남풍이 불기 시작한 것 같지만, 아직은 찬 바람이 옷깃에 스며 든다. 연인의 입김처럼 아지랭이가
피어 오르고 파릇 파릇 버들 가지에 싹이 트고, 긴 겨울 잠에서 깨어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아침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먼저 충북 단양을 소개 합니다".
단양8경 중에 구담봉과 옥순봉을 품고있는, 단양이라는 지명은 연단조양 이란 말에서 왔다고
하는데 연단은 옛날 신선이 되고자, 도를 닦던 도인들이 만들어 먹었던 특수 환약이였고
조양은 그 빛이 고르게 비친다는 뜻이라고 하니, 단양은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 좋은 고장 이라는
뜻이다.
단양에는 8가지 경승지가 있는데, 이를 단양8경 이라고 부르며 이에는 도담삼봉,석문,구담봉
옥순봉,상선암,중선암,하선암,사인암이 있다
단양 문화재는 우리나라 천연 기념물, 고수동굴,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 등이 있다.
봄을 안고 오는 따스한 기운을 받으며, 어린 시절 뛰어 놀던 내 고향 구미 마을로 향한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마을의 일부가 수몰 되어, 포장되지 않은 도로의 좌,우에 미루나무와 아카시아꽃
풍경은 오 간데 없고 화려하게 다듬어진 조경은, 왠지? 쓸쓸 하기만하다.
용수 구미의 전설은 이렇다.
금수산의 정기를 받아 장씨 문중 종가에서 사내아이 장수가 태어났다. 옛날에는 집안에 장수가 태어나면
정부를 정복 한다고해서 누명을 씌워 온 집안 3족을 망하게했다. 그래서 집안 회의를 하였느데
이 아이가 크기 전에 죽여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후 용수구미에는 용이 한마리 나와서 슬피
울다가 승천하지 못하고 죽었다고한다. 그래서 그곳을 용수 구미 라 불렀다.
둔들 바위에 이르다.
행정 구역의 폐합의 따라 봉산, 유다리,구미를 병합하여 외중방리로 불렀다. 외중방리는 단양군 읍내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중방리의 바깥쪽이 되므로 외중방리라 하였다. 봉산에는 조선시대의 봉수대
옛터가 아직 남아 있으며 이름하여 봉산 이 라하였고, 또 조금 가다보면 유다리가 나온다.
36번 국도가 생기기 이전까지만 해도 소금배가 유다리앞, 개자리에 정박하여 주막이 성황을 이루었고
마을에 살던 부자 유씨가 나무다리를 놓아주었느데, 그 다리를 유씨 다리라 부르다가 유다리라고
전래 되었다.
저의 유년 시절을 보냈던 구미 마을은, 뒷산의 형세가 여우가 꼬부리고 옆으로 누어 있다하여 구미
라 하였다.
깊은산 계곡에 초라한 초가집 그 곳은 나의 집이다. 막대기 끝에 개구리 미끼를 달아 돌바위 밑으로
살며시 집어 넣어서 가재 잡기를 하는것이다. 조금있으면 막대기가 흔들흔들 거릴때 조심스럽게 막대기를 앞으로 끌어내면은 가재가 먹이를 먹느라 정신없이 붙들려 나온다. 어린 그가 보기에는 정말
신기하고 환희 스러웠다. 이런 시절을 보내면서 생명들을 해친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이 마을에 약 400년 되는 느티나무는 새해가 되면, 마을 사람들이 이 나무 앞에 모여서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기원하며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나무에 줄을 메어, 그네를 타고 제사를 지내는 등 신성시
여기고있다,
이렇게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 변함없이 마을을 지키고 있건만, 사람들은 저마다 이익을 위해 하나 둘
빠져 나갔고 도시에 화려한 네온 불빛의 현혹되어, 지금도 울고 웃고 수고한다.
내고향 구미 마을은 가깝게는 국립공원인 월악산과, 주위 경관이 수려하기로 소문난 단양8경 중에
구담봉과 옥순봉이 있다. 조선시대의 선비 퇴계이황 선생께서 구담봉과 옥순봉을 즐겨 찻으셨다.
지금부터 퇴계 선생과 두향 아씨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퇴계 이황은 1501년에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나셨다. 늦은 나이 34세에 대과에 급제하면서 벼슬을 시작한다. 퇴계 선생은 48세에 단양 군수로 부임을 하게 되는데 그 곳에서 두향을 만나게
됩니다. 첫눈에 퇴계 선생에게 반했지만 처신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했던 퇴계 선생 이 였던지라
한 동안은 두향의 애간장을 녹여었다. 두향은 단양군에 속해있던 관기 였다.시와 글씨 그림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가야금에도 능했으며 매화를 특별이 좋아하는 소녀였답니다.
당시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어던 퇴계 선생은, 그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 같았던 두향을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두사람의 깊은 사랑은 그러나 겨우 9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다. 퇴계 선생이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였다. 두향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변고였다.
짧은 인연 뒤에 찻아온 갑작스러운 이별은 두향이에겐 견딜 수 없는 충격이였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움 뿐이다". 두향이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시 한 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어
어느덧 술 다하고 님 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다. 두사람은 1570년 퇴계 선생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퇴계 선생이 단양을 떠날때 그 의 짐속엔
두향이가 준 수석2점과 매화 화분 하나가 있었다. 이때부터 퇴계 선생은 평생을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퇴계 선생은 두향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매화를 두향을 보듯 애지중지 했다.
선생이 나이가 들어 모습이 초췌해지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했다. 퇴계 선생을 떠나보낸 뒤 두향은 간곡한 청으로 관기에서 빠져나와 퇴계 선생과 자주
갔었던 남한강 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다. 퇴계 선생은 그 뒤 부제학,공저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말년엔 안동에 은거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때 퇴계 선생의 마지막 한 마디는
이 것이었다. "매화에 물을 주어라" 선생의 그 말속에는 선생의 가슴에도 두향이가 가득했다는 증거였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퇴계 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단양에서, 죽령 고개를 넘어서 풍기를 거처 4일 동안이나 걸어서
내려왔다. 한사람이 죽어서야 두사람은 만날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죽령 고개를 넘어 단양으로 돌아가
임 보낸 이별이 하도 서러워서 두향은 결국, 구담봉의 남한강 강선대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두향의 사랑은 한 사람을 향한 지극히 절박하고 준엄한 사랑이였다